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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 야구사랑은 인천의 진한 지역정서1
작성자 소순애 (ip: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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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작성일 2008-10-16 11:53:3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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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조회수 687

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글을 보세요.

 

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것은 개항장이던 인천을 통해서였는데요.

철도, 우편, 전화, 등대, 기상관측 제도가 국내 최초로 도입되었을 무렵

에 축구와 함께 야구도 들어왔습니다.

스포츠 ' 베이스 볼 '도 개화 문물의 하나였다고 하네요.

 

영어야학교 생도들 처음 시합해

 

과거의 통설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(현 서울YMCA)의 총무 필립

질레트가 야구를 가르친 것이 효시라고 했었다.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

인천 지역사를 알지 못한 데 따른 오류이다. 아직도 역사를 왕실이 있던

' 서울 ' 위주로 기술한 잘못된 예의 하나라 하겠다.

양탕국(洋湯국 ㆍ커피)의 도입을 서울의 손탁 호텔로, 철도 시발지를 노

량진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역사적 실체에 다가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.

 

일본 개성교 학생들이 일본 야구 도입기에 그랬듯, 인천고( 仁川高 )의

전신인 인천영어야학교 생도들 역시 역사적 중계자로서의 역할을 해 냈

던 것이다. ' 인천고100년사 ' 는 영어야학교 1학년생의 1899년 2월 3일자

일기를 소개하고 있다.

 

' 3시 근무가 끝난 다음 4시경부터 중상(中上) 군을 불러내어 일연종

( 一蓮宗 ㆍ 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 ) 앞 광장에서 < 중량 > 함께

' 베이스 볼 ' 이라는 서양식 공차기를 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

갔다.

 

비록 14세~5세 된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이것이 '국내 최초의 야구

(野球) 기록' 인 것이다. '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것 ' 이라는 말이 있

듯이 이 일기장의 기록은 인천 제물포가 야구의 도입지이며, 이미 인

천에서는 야구가 일반화된 운동 경기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단서인

것이다.

 

그로부터 출발한 야구의 열기가 결집돼 첫 팀을 창단한 것은 1915년

경이었다. 그 해 10월 31일 인천상업 팀은 이미 철도구락부 주최 경룡

추계야구대회에 참가했고, 그 후 인우구락부, 실업구락부, 미신구락부

등이 등장해 '웃터골' 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인천야구의 싹을 키워갔다.

 

1919년에는 경인기차통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이 한용단(漢勇團)

을 조직했는데, 이것이 인천 한인 최초의 야구팀이었다.

한용단은 인천 부민의 희망이요, 우상이었고, 야구사랑은 그 무렵부터

인천의 지역 정서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.

1922년 5월 인천체육회 야구부가 주최한 전인천우승기쟁탈전에는 한용단,

기봉단, 상우단 등 조선인 팀을 비롯해 10개 팀이 참가하는 등 일대 붐을

이루었다.

그러나 193.4년 이들이 활동하던 웃터골 공설운동장 부지에 인천부립중

학교(仁中)가 세워지게 되자 야구장은 도산정(桃山町 ㆍ 지금의 숭의동)

으로 이전해 갔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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